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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디베이트와 서재필 박사<케빈리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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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3.10.08  11:5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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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 정확히는 1884년 갑신정변이란 사건이 있었다. 개화를 꿈꾸던 일부 세력이 쿠데타를 감행했다. 하지만 3일 천하로 사건은 막을 내리고 관련자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그 핵심 중에 서재필 박사가 있었다.
서재필 박사는 20살의 나이에 그 정변에 참가했다. 피 끓는 나이 아닌가. 하지만 정변의 실패로 그는 일본으로, 그리고 다시 미국으로 도피한다. 그 사이 역적의 가족이라는 죄로 가족들은 모두 죽는다. 아버지, 형제, 부인이 목숨을 잃는다. 어린 자식들은 굶어 죽었다.
20살의 나이에 이런 참담한 경험을 한 서재필 박사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그는 일생을 통해 기록을 남기는 일을 즐기지 않았다. 과거를 회상하기 싫었기 때문이라고 이해한다. 가족이 모두 죽었는데 그 기억을 어찌 또 하고 싶을까?
그런 심정으로 그는 샌프란시코에 도착했다. 거기서 막일을 했다. 다행히 은인을 만나 해리 힐만 아카데미라는 중고등학교에 입학한다. 조선에서는 최연소로 과거에 급제한 천재가 미국에서는 22세의 나이로 다시 중고등학교에 들어간 것이다. 그곳에서 그는 3년 동안 공부를 했다.
이 대목이 한국 디베이트 역사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그곳에서 그는 스피치 & 디베이트 활동을 했다. 스피치 대회에 나가서는 2등상을 받기도 했다. 이곳에서의 경험이 한국에서 최초로 디베이트 활동이 이루어진 계기가 된다. 이후 서재필은 대학에 진학하고, 또 의과대학원을 졸업하여 한국인 최초로 미국 의사가 된다.
그 사이 조선은 변해있었다. 개화파가 득세한 것이다. 서재필 박사는 한국을 떠난지 11년 만에, 31세의 나이로 다시 한서린 조선으로 향한다. 서재필은 갑신정변의 실패 원인을 ‘소수의 위로부터의 개혁’이 갖는 한계라고 본 것같다. 그래서 이번에는 접근을 달리했다. 민중들 속에서 개혁의 힘을 찾고자 한 것이다. 그는 배재학당에서 강연하고, 협성회를 조직했으며, 독립신문을 만들고, 독립협회를 만들었다. 그야말로 조선 독립운동의 기초를 세운 것이다.
이 과정에서 한국 디베이트는 첫번째 선을 보인다. 정확하게는 1896년 11월 30일 협성회의 창립총회 때 한국 역사상 최초의 디베이트가 진행된 것이다. 주제는 <국한문 혼용 이슈>.
당시의 뜻있는 자들은 전율했다. 금새 협성회의 토론회는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이 성과를 이어받은 것이 독립협회의 토론회. 독립협회는 모두 34차례의 디베이트를 진행한다. 그 주제들을 살펴보면 모두가 그 당시 현안들이다. 이런 노력은 만민공동회로까지 이어진다.
서재필 박사가 주도한 디베이트 활동은 한국 최초의 디베이트 활동이라는 의미 외에도 중요한 점이 있다. 바로 그 활동이 당시 조선의 현안이었던 개화 독립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 그 접점 속에서 당시 디베이트 활동은 역동적인 역할을 했다.
서재필 박사는 조선에서 3년 체류하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간다. 서재필 박사의 활동을 못마땅하게 여긴 세력들의 부추김 때문이었다. 그런 압력에 겁먹을 박사가 아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자신의 판단으로 인해 목숨을 잃은 가족을 떠올렸을 것이라고 본다. 나 하나 죽는 것은 두렵지 않지만, 그로 인해 주변이 위협당하는 것은 또다른 트라우마가 되지 않을까?
미국에서 돌아간 서재필 박사는 사업 수완도 발휘했다. 꽤 큰 비즈니스를 해서 돈도 벌었다. 하지만 한국이 일본에 합방된 이후 미국 교포들 사이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나자 그 재산을 거기에 다 쓰고는 파산한다.
1947년 서재필 박사는 83세의 나이로 다시 한국을 방문한다. 미군정 최고 고문이자 과도 정부 특별 의정관의 자격이었다. 한국 국민들 사이에는 서재필 대통령 추대 운동까지 벌어졌다. 하지만 해방 직후의 혼란 속에서 그는 다시 1년 만에 미국으로 돌아간다.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서재필 박사는 87세의 나이로 필라델피아 몽고메리 병원에서 한많은 일생을 마친다. 1977년 대한민국 정부는 그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고, 1998년 유해를 한국으로 옮겨 서울 국립묘지에 안장한다.
서재필 박사는 미국에서 Jaisohn이란 Last name을 썼다. 그와 새로 결혼한 서양인 부인 사이에는 두 딸이 있었다. 결과적으로 Jaisohn이란 Last name은 미국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한국 디베이트 역사의 초석을 다지고, 또 이를 한국의 개화 독립에 접목한 서재필 박사를 추모한다. 지하에서도 나라 걱정을 하고 있을 그분 앞에 다시 한번 옷깃을 여민다. 11월 30일에는 만사 제쳐두고 국립묘지에 다녀와야겠다.

   
  서울 동작구 현충원에 있는 서재필 박사 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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